[야고보서 2강] 야고보서 1:1~27 / 야고보서 서론/ 야고보서 1장 / 야고보서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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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강] 야고보서 1:1~27 / 야고보서 서론/ 야고보서 1장 / 야고보서 강의안

[야고보서 2강] 야고보서 1:1~27 / 야고보서 서론/ 야고보서 1장 / 야고보서 강의안

 

1:1) 이와 같은 표현은 초대교회 당시 여러 서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형태입니다.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총 2번 사용하는데, 그 중에 한 번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 선상에 놓고 편지를 시작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설명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는데, 그때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에비온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 선상에 놓고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편지를 쓰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여기 저기 흩어져서 살아가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기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제 살펴본 것처럼 야고보서는 ‘공동서신’에 해당하는 서신서입니다. 즉 특정 교회나 인물에게 쓰여진 편지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하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이죠. 지금이야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메일을 보낼 수 있지만, 이때 당시에는 그런 것이 없지 않습니까? 예를들어 로마서나 고린도서 같은 경우는 로마교회와, 고린도 교회라는 특정된 주체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달하면 되는데, 야고보서 같은 경우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보내야 하는 것이기에, 어떻게 이것을 보냈을까?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통 사도들은 자신의 동역자나 같이 여행하고 있는 성도의 편에 편지를 부쳤습니다. 로마서 같은 경우는 여집사 뵈뵈에게 전달되었고, 빌립보서는 에바드로디도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종이나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 사회에서는 대필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대필전문직업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종이 대신 사용하던 양피지나 파피루스 위에 글을 적는다는 것은 전문적인 숙련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서신들 같은 경우는 대필자에 의해 기록되어 전파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원 중 특별히 선택된 일꾼들이 사도들의 말을 대필하여 전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같은 경우는 실라에 의해 대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야고보서도 본서에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대필자들을 통해 여러 곳에 동시에 편지를 보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사말을 쓰며 문안하고 있습니다. 문안하다의 뜻은 헬라어 ‘카이레인’인데, 이것은 즐거워하다, 기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박해 이후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련 가운데에서도 감사하며 기뻐할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야고보는 이어서 “형제들아”라고 하며 운을 띄웁니다. 이는 야고보가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친밀한 표현으로써 본서에서 여러번 사용되고 있는 호칭입니다. 야고보는 그들의 최대 관심사인 ‘시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시험은 시련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내부로부터 생겨나는 시험을 뜻하는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온 시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하거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페리페세테’인데, 이는 “한 가운데 떨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시련 한 가운데 떨어지거든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시련 가운데에서 기뻐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외부로부터 오는 시련은 낙심하지 않고 이겨내면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 야고보가 시험을 기뻐하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시험을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인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로마서 5장 4절에도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바울과 야고보의 차이점은 사도바울은 ‘인내’를 연단의 원인으로 보고 있지만 야고보는 ‘인내’는 연단의 과정을 거친 결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의 관점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바울은 시련의 과정을 중요시 한 것이고, 야고보는 고난 자체를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것은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인용하는 산상수훈,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온전함’을 이루라는 것은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토대로 성도들도 인내를 통해 온전하여질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온전함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완벽주의자처럼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사회적으로 손상되지 않고, 신앙적으로 완성된 존재를 꿈꾸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행위의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신앙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성도들에게 제시합니다. 그래서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신앙을 요구합니다.

 

1:5~8) 그리고 5절부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야고보서는 크게 보면 세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험이고 또 하나는 지혜, 그리고 세 번째는 부와 가난입니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세 가지 주제를 반복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지혜인데, 야고보는 당한 고난과 시험에 대처하기 위해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그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의심한다면, 바람에 밀려 요동치는 물결처럼 불안정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지혜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잠언 2장 6절과 같은 말씀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지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렇게 의심하는 자들에 대해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이들은 하나님께 어떤 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1:9~11) 지혜에 대해서 설명한 후 이어서 부와 가난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부하거나, 때로는 초라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즉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재물의 속성, 덧없음에 대해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12~27) 앞서 세 가지 주제(시련, 지혜, 부와 가난)에 대해 운을 띄운 후, 야고보는 다시 한 번 더 세 가지 주제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1:12~18)

우리나라 말로 ‘시험’으로 번역된 단어는 모두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test(시험) 또 하나는 temptation(유혹), 또 하나는 trial(시련)입니다. 테스트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학교 시험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통과’해야 합니다. 유혹은 마귀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겨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련은 하나님이 주실 때도 있고, 악한 마귀가 줄 때도 있고, 때로는 자신의 죄로 인해 자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견뎌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마귀에게 받은 시험은 테스트가 아니라 유혹이었습니다. 13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혹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14절에 나오는 시험 역시 유혹으로 번역해야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환난이나 시련을 잘 견디어내면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3~4절). 마치 욥이 고백한 것처럼 자신의 환난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금과 같이 만들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야고보가 지혜문학(욥기, 잠언, 전도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야고보는 환난과 고난을 통해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사랑이 있는 사람이야 말로 그 모든 고난을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을 꺼내듭니다. 면류관은 승리한 자들에게 주는 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고난 당할 때 그 고난을 견뎌내는 자는 승리자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부분입니다. 사도바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하면서,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나, 요한이나, 사도바울이나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승리는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야고보가 말하는 승리의 면류관은 다름 아닌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중의적 의미입니다. 환난에서, 박해에서 견뎌냄을 통해 나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과 함께, 결국 믿음으로 승리하여 천국에 가게 되는 영생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이빈다.

 

(1:13~16)

 사람은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원인부터 찾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한 여자가 운전을 하고 가다가 접촉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서 아빠와 엄마가 사고 현장으로 오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사고를 낸 딸에게 건네는 말이 아빠와 엄마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왜 그랬어? 뭐하다가 그랬어?”와 같이 사고의 원인을 먼저 찾는다는거예요. 엄마는 뭐라고 합니까? “괜찮아? 안다쳤어?”라고 먼저 물어본다는 거예요. 사실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기보다, 사람의 보편적인 모습을 나타내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찾게 됩니다.

 

 

 시험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 이 세상이 돌아간다는 큰 그림에서 살펴 보았을 때 제일 원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악을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구도 시험하지 않으시고, 시험 받지도 않으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시험의 원인을 찾게 되는데, 시험의 원인을 인간의 욕심 때문이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야고보는 욕심은 죄를 낳게 되고, 죄의 결과는 죽음(영혼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죄가 ‘장성하다(아포텔레오)’라는 것은, ‘끝까지 마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죄가 죄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끝까지 가서, 결국 죽음까지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가 죽음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우리의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사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욕심이라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상태는 죄일까요? 아닐까요? 우리는 이것에 대해 생각할 때 “죄의 가능성이 있는 상태”로 생각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인간이 욕심을 갖기 시작한 때부터 죄가 싹이 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망까지 이른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우리는 흔히 죄를 단계적으로 구분해서 생각합니다. 생각으로 시작해서, 욕심을 품고,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야 죄라고 여기지만, 야고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욕심 그 자체를 죄로 보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야고보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으로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처럼 야고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으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지금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풍성해졌기 때문에 그때 당시의 문화적 관습에 따라 생각하지 않죠. 지금은 ‘식욕’이 있다 해서 그것이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식욕’은 우리의 죄성을 만나서 누군가의 음식을 빼앗는 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야고보는 이미 욕심을 품은 것 자체를 죄로 보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시험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사람은 시험을 받게 되는데, 시험 때문에 압박감을 느끼게 되면, 자기 나름대로의 해법을 찾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시험을 극복하며 믿음을 유지하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 죄악된 해법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악된 해법으로 순간의 시험을 이겨낸다 할지라도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15절에서 죄악된 해법으로 시험을 이겨내려고 하는 욕심이 죄를 낳는 것이고, 그 죄가 결국 영적인 죽음으로까지 이어지게 만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 풍족하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5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17절에서도 좋은 은사와 선물들, 좋은 것들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언급해줍니다. 이러한 은사나 선물들은 빛되신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혹에 넘어가서 범죄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천지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천지만물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생물들을 다스리고 땅을 정복하게 되는데 쓰이는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들입니다. 음악, 미술, 문학, 과학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생겨난 산물들입니다. 이것들이 모두 ‘위로부터’내려온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 역시도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잠언의 내용에 영향을 받은 야고보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8절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집니다. 이것은 모든 곡식의 첫 소산물이 하나님께 바쳐지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피조물들 중에 첫 열매가 되어서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야고보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하면서, 복음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옛 성품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9절에서 또 한번 ‘내 형제들아’하면서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며 호소합니다.

“너희가 알지니”라고 하면서 시작되는 이 말은,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중임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쉽게 풀이하면 “너네가 알고 있듯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19절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하나는 듣기를 속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난다고 하는 것, 즉 구원받는다는 것은 일시적인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감리교에서도 구원은 이루어간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듯이, 구원은 꾸준히 지속되는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을 더듬으면서 천천히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게속해서 자기 주장만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논쟁에 빠지기가 쉽고, 서로 다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죠.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 생각에 맞는 것만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죠. 야고보는 그러한 부분을 지적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깨닫기 전에, 내 생각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주장하지 않고,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어야 할 것입닏.

 

세 번째는 성내기를 더디하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천천히 화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분노와 증오와 같은 감정들로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보존하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는, 분노와 증오가 내 마음에 가득히 자리 잡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막 화가 나고, 성질내고 있는데 뭐 이야기 하면, 지금 그게 중요해? 라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있죠.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에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헬라어 원어 ‘가르(왜냐하면)’이 빠져 있습니다. ‘가르’라고 하는 단어는 앞에서 설명한 것을 근거로 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20절 말씀 앞에 ‘왜냐하면’을 붙여서 읽으면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왜냐하면”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라고 읽는 것이 타당합니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둘째치고,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을 해치게 됩니다. 그리고 내 화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도 상하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 정신에 위배되는 행동이기 때문에 야고보는 그것을 피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뭔가?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행위나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20절 말씀에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21)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말해줍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성내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는 화를 제거해야 한다고 해야 할 것인데, 야고보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는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로워질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어 버린다는 말씀은 헬라어 원어로 아포데메노이라는 것으로, 옷을 벗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오염된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모두 도덕적인 악행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중복된 표현으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인 악을 버려야 함을 강력하게, 단호하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2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받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말씀을 받기만 하는 것은, 곧 듣기만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야고보는 이것을 통해 ‘게으르고 나태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이 말씀에서 말씀을 ‘행하는 자’라는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행동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면서 자신의 삶으로 말씀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듣기만 하는 것을 자신을 속이는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듣는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면 어떤 걸까요? 매주 주일에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나, 일주일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로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경우를 의미할 수 있겠죠? 인간의 본성은 완악하여서 내가 주일에 예배에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지적하면서,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기만적 행위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부가적인 설명을 해줍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도)을 듣고 행동하지 않는자를 거울을 보는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다’라는 것은 힐끔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서 자세하게 관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의 거울은 오늘날 거울처럼 유리로 만들어진 거울이 아니라, 구리로 만들어진 거울이었기 때문에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여도 희미한 모습으로 비춰질 뿐, 확실하게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비유한 것은, 열심히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행하지 않으면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처럼 불확실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24절도 같은 의미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마치 희미한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거울을 떠나면 자신의 모양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적인 지식으로, 머리만 가득히 채우는 것으로는 100%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듣고, 행동해야 100%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잊어버리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말씀을 듣고 행동하지 않으면, 곧 들었던 말씀까지 잊어버리고 다시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죄의 상태로 돌아가는 모습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어려운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25절부터는 말씀을 듣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은 야고보와 이 편지를 받는 대상들이 ‘유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거예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뭘까요? 구약시대의 율법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핸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이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강제적인 요소가 있었다라면,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율법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유로운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세의 율법은 제도나 법률을 통해 제정된 것이라면,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확실한 실체가 되어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을 유심히 보고, 지키고, 행동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5절 중반부에 ‘실천하는 자’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서 성공한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라고 하는 것은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하더라도 실천하면서 실패를 경험하거나, 때로는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실행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자체가 이미 복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26절에서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경건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헬라어로 ‘드레스코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기도문을 중얼거리다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경건하다는 말을 ‘예배 외적인 모습’, 즉 기도하고 구제하고 금식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외식을 일삼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말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절제하지 못할 때,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 되버리고만다는 것입니다.

 

재갈을 물린다는 것은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막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혀에 재갈을 물려서 남을 비방하거나, 악담하는 것을 막는 모습을 나타내줍니다. 자기 혀를 절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확신하는 것은 곧 자기를 속이는 행위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과 행동이 틀린 경건은 위선을 일삼는 자들에게서 오는 헛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6:2)

 

1장 서론의 마지막, 27절에서는 ‘경건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정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경건한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실제로 경건한 삶은 내적인 모습으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정도의 외적인 삶으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에 대해서 말을 해주는데, 정결한 것과 더러움이 없는 것은 중복된 표현입니다. 특히나 고대 사회에서 종교예식을 할 때에는 정결하고 흠이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쓰인 표현입니다.

 

야고보는 그래서 더러움이 없고 흠이 없고 정결한 경건한 삶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고아와 과부를 환난중에 돌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두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으나, 야고보는 나그네, 병든 자, 갇힌 자 등등을 다 포함한 것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특별히 교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대상들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시대로부터 대대로 내려져오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야고보는 단순히 교제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의 삶을 살피고, 도와주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세속’이라는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죄악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사도요한이 자주 쓰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나 “세상에 속한 것”등으로 표현과 같은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진짜 경건에 대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스스로도 죄악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고, 말씀을 삶으로 나타내는 지속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 경건이라고 보았습니다. 경건하길 원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의 거룩한 생활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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