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순종은 믿음을 빛나게 한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누가는 세례요한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하게 될 것을 예고해주는 수태고지의 장면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 오늘 본문말씀을 상상하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때는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임신한 후 6개월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이때 사가랴에게 찾아갔던 천사 가브리엘이 작은 시골 동네인 나사렛에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이전에 천사가 찾아갔던 사가랴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인 사가랴도 천사를 처음 만났을 때 놀라서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학자들마다 이야기는 다르지만 마리아는 기껏해야 16살, 17살쯤 되는 소녀입니다. 그런데 이 소녀가 천사를 마주하게 되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처럼 마리아가 크게 놀란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천사를 만났다는 사실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그 천사가 전해준 인사때문이었습니다.
28절에 보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가서 인사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29절에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라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문자로 보기 때문에 천사가 전해준 인사가 그저 보기 좋은 인사처럼 느껴지지만 우리가 이 당시의 마리아가 되어 천사를 마주했다고 생각해보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고 말할 때는 그 사람에게 특별한 사명과 특별한 역할을 맡기실 때 주로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도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셨고, 모세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들을 맡기실 때 쓰시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나사렛이라고 하는 시골 동네에 살고 있던 마리아, 또 당시에는 남성 중심적인 시대적 문화가 있었는데 여자인 마리아, 그것도 결혼하지 않은 소녀인 마리아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맡기신다? 여러분 마리아 스스로도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하게도 마리아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니 천사가 마리아를 안심시켜주려 합니다. 그런데 말은 안심시켜주는 말인데 이 말은 마리아의 마음을 더 어렵게 만듭니다. 뭐라고 말씀합니까? 30절과 31절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32절과 33절을 통해 그 아들이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고,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이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마리아가 장차 잉태하고 낳을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지금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할 말입니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천사가 눈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놀랄 일 아닙니까? 그런데 천사가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일을 맡기신다고 하질 않나, 그 큰일이 임신이라고 하지를 않나, 그렇게 임신할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황당한 일입니까? 그런데 천사가 전하여 준 이야기가 더욱 황당한 이유는 바로 마리아가 ‘처녀’의 몸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마리아는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질문을 듣고 이렇게 대답해줍니다. 35절 말씀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이 모든 일은 마리아의 힘이나 능력으로 인해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도권을 잡으시고 능력으로 행하시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시겠다고 해도 마리아는 동정녀인 자신이 잉태한다는 일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남자와 몸을 섞지 않은 처녀가 요셉이라는 약혼자가 있는 상황에 임신을 한다는 것은 죽음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는 약혼도 결혼과도 같았는데 약혼자가 있는데 바람을 피우면 결혼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처벌하였습니다. 그런데 약혼자가 있고, 그 약혼자와 몸을 섞지 않았는데 임신을 한다? 이것은 간음죄로 처벌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간음죄에 대한 처벌은 무엇입니까?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마리아는 이 모든 상황이 펼쳐진 것을 선뜻 이해하고 따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던진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37절 말씀입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쉽게 말하면 이것입니다. “너 엘리사벳 이야기 못들었니? 평생 아기가 없던 노년의 할머니가 임신했다는 것 못들었니? 할머니가 임신하는 기적이 가능하다면, 처녀가 임신하는 것도 가능하단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인간의 생각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게 되면 하나님은 그 일을 가능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을 듣고 천사는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짧은 구절들 안에 놀라운 일들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천사와 마리아가 나눈 이 짧은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순종은 믿음을 빛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모두의 소망을 자신을 통해 실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마리아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임신을 하고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 마리아는 사람들로부터 온갖 오해와 수난과 비난을 겪어야할 것입니다. 처녀라고 여기던 마리아가 임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될 요셉이 떠나갈만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리아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러한 어려움들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통해 우리는 믿음과 순종이 분리되지 않는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크게 두 가지의 순종이었습니다. 첫째는 상황을 뛰어 넘는 순종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임신을 하게 되면 마리아는 약혼자를 배반한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힐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이 쏟아질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두려운 상황에도 마리아는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순종하는데 주저하는 이유로 상황과 환경을 내세울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너무 분주한 상황이라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니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자녀가 대학을 가야하는 중요한 상황이라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라고 말하며 여러 상황과 환경을 내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뛰어 넘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바라보며 순종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순종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빛나게 할 것입니다.
둘째는 이성을 뛰어 넘는 순종이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서 한 여러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때 마리아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이성적인 선택할 것인가? 신앙적인 선택할 것인가? 입니다. 이때 마리아는 믿음과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이 꼭 나쁘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뛰어 넘어 믿음으로 순종할 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뛰어넘는 믿음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이성을 뛰어 넘는 믿음의 순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상황과 환경, 그리고 나의 이성을 뛰어 넘는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순종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더욱 빛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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