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한계를 넘어(다니엘 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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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는 처음 유행하게 되었을 때, 코로나19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여러 한계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 간에 대화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만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역시나 예배의 제한, 한계였습니다.

 

 아마도 타의에 의해 예배가 중지된 것은 코로나19가 처음일 것입니다. 수많은 일들 가운데서도 예배가 정지된 적이 없었던 많은 기독교인들은 반발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일로 인해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예배에 대해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받아들인 것이 온라인 예배라는 플랫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온라인 예배가 예배가 맞냐? 아니냐?라는 것이죠. 잠시 논쟁은 있었으나 대부분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온라인 예배를 인정하고, 우리도 이렇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지금도 우리가 예배할 수 없도록 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예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연 예배가 뭘까? 이런 상황에 우리는 예배할 수 있을까?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을 알아봅시다. 예배의 본질이 뭘까요? 예배는 왜 드려야 하는 걸까요?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즉 교제를 뜻하는 거예요. 예배의 모든 요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말이 어려운 것 같나요?

 

예를 들어 우리의 예배를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비대면으로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찬양이 뭘까요? 찬양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고백과 감사를 드리고, 결단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찬양도 우리의 반응인거죠. 대표기도는 어때요? 기도하는 사람이 대표로 하나님이 하신 일과 행하실 일들에 대해, 기도하며 드리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것들에 대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지 않지만, 어른들 같은 경우에 찬양대도 있어요. 찬양대도 마찬가지죠. 헌금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원래 하나님 것인데,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헌금이잖아요. 이것도 역시 우리의 반응입니다. 이렇듯 예배의 모든 요소, 하나 하나는 모두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베푸신 것들에 대해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반응인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배중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 설교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을 주고, 받으며 소통하는 것이 본질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기에, 예배를 통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러는 것이죠. 즉 예배는 소통과 교제가 핵심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는 예배의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예배의 한계는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대면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런 예배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뭘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리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대면하여 있지 않으나, 하나님께는 대면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에 나오는 이유는, 저를 만나기 위함도 아니요, 선생님이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함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때 대면하여 보길 원하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예배의 한계는 공간의 한계입니다. 공간이 제한된 상황인거죠.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비대면으로 예배하는 중에도, 하나님은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와 대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배의 본질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소통과 교제라고 했습니다. 예배의 본질이 소통과 교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면예배로, 때로는 비대면예배로 자유롭게 넘나들며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면, 진실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는, 우리와 같은 예배의 한계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지혜롭게 극복한 케이스가 나옵니다.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입니다. 이들에게 찾아온 예배의 한계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예배의 공간에 한계가 찾아 왔지만, 이들에게는 예배의 대상에 대한 한계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상에게 절하라는 것이었어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예배하지 말고, 우상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배도 하지 말고, 기도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우리보다 더 큰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들의 반응은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왕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지금 이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한계가 찾아왔을 때 이들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한계가 찾아왔을 때의 반응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계가 찾아 왔을 때 한계를 넘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일찍 포기해버리는 사람도 있죠. 그런데 반대로 한계가 찾아 왔을 때 그것을 잘 넘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서핑과 같죠. 바다에 큰 파도가 찾아옵니다. 그 파도에 휩쓸려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그 파도를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의 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적으로 한계에 부딪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어요. 오늘처럼 외부의 어떠한 일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한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곳은 이렇게 코로나19라는 위험이 찾아올 때 아예 예배를 포기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예배드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한계, 신앙의 한계는 믿음으로 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 속에서 이렇게 예배드리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이 예배를 받으신다고 하는 믿음,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에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믿음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라도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가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신앙의 한계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실제로 한계가 찾아왔을 때 그 한계를 멋지게 뛰어 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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