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사랑의 능력 (요한일서 4:7-12)

728x90

[설교 모음] 사랑의 능력 (요한일서 4:7-12)

[설교 모음] 사랑의 능력 (요한일서 4:7-12)

 

 오늘은 요한일서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성경 인물 중에 누가 좋으세요?

 

 전도사님은 예전에는 사도 바울이 좋았어요. 스마트하고, 열정적인 그런 모습에 ‘아 나도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도바울도 물론 좋지만 요한을 많이 묵상하고 생각하고 그래요. 요한을 보면 참 온유한 성품 가운데 강단도 있고, 무튼 참 멋있는 사람 같아요. 여러분들도 시간이 되면 요한이 쓴 성경을 한번 유심히 봐보세요. 그러면 그 안에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어요. 그렇죠? 여러분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예수 믿는다.’라고 말할 때는 대체 어떤 걸 믿는다고 말하는 걸까요? 우리가 어디 가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는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라는 것, 또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 또,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믿는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은 안 믿어" 라던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은 믿는데, 부활하셨다는 것은 안 믿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는 이 모든 것이 다 믿어질 때 이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맥락으로 여러분들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예수님 믿으세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믿음에도 단계가 있구나”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 속에 느껴지는 은혜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은혜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감정은 우리에게서 기쁨으로 표현되기도 하고요.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때때로 기적적인 일들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시는 거죠.

 

 

 근데 우리가 ‘은혜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라는 것은 우리 차원에서는 만족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질문이 생기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끝에 있는 단계, 가장 우리가 이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단계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겠구나”, “이것이 신앙생활의 완성을 향해 가는 길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런 말이 있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 들어보셨죠? 아이가 나이가 들면서 부모를 이깁니다. 그런데 아이가 철이 들면 절대로 부모를 이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어릴 때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많고 하나님을 이기려 들 때도 많이 있지만 우리의 신앙이 철이 들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도 요한은 오늘 이 공동체에게 ‘너희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7,8,9절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그리고 이어서 10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영어 성경을 보면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영어 성경에 보면 “This is Love.”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 요한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사랑이라고 강조하며 이야기했을까요? 그때나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나 모두 사랑에 대한 상처들이 존재합니다. 여러분들 사랑해보셨어요?  우리는 사랑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왜죠? 우리들의 사랑은 ‘if’의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할 거야.. 왜요? 사랑에 대한 상처가 있거든요. 나 혼자 사랑하다가 상처를 입는 것이 싫은 거예요. 짝사랑은 늘 가슴 아프죠? 짝사랑 해보셨나요? 참 힘들어요. 그렇죠? 짝사랑도 짝사랑인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는 참 크게 다가옵니다. 인간이 하는 연약한 사랑에는 조건이 붙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상처와 아픔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여러분들 어떤 분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남자는 키가 큰 여자를 좋아할까요? 작은 여자를 좋아할까요? 머리가 좋은 여자를 좋아할까요? 나쁜 여자를 좋아할까요? 답은 예쁜 여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쁜 것이 끝나면 사랑도 끝이 나는거죠. 우리가 사람을 사랑할 때 어떤 조건들이 붙기 시작하면 그 조건이 끝났을 때 우리의 사랑도 끝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 조건적인 사랑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럼 부모님들의 사랑은 어떨까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부모님들의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랑을 하시는 부모님들은 사랑하시면서 상처를 받지 않을까요? 저희 부모님도요 제가 키가 작아도, 생긴 게 이래도 저를 너무 사랑하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세요. 그런데 저에게 상처를 안 받으셨을까요? 아니요 받으세요. 부모님들도 자식들이 말을 안 듣거나 속을 썩이면 상처를 받습니다. 결국 사람이 하는 사랑은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도  깊이 들어가 보면 불완전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너희들이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그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세 프랑스 수도사였던 베르나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책에서 4단계의 사랑을 말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은 우리가 이해가 잘 됩니다. 그런데 이 네 번째 사랑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잘 들어보세요.

 

첫째,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원초적이고 초보적인 사랑입니다.

둘째,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나를 위해서 사랑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이 끝나면 그 사랑이 끝나는 거죠.

셋째,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이 정도 되면 대단한 거 아니에요?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 신앙적으로 참 높은 차원의 사랑이죠. 그런데 베르나르는 그 위의 단계의 사랑이 있다. 그것이 뭐냐?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이다."라는 거예요. 오늘 10절 말씀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보내주신 그 사랑을 알고 나니까 내가 너무 존귀한 거예요.  하나님을 생각하면 너무 기쁘고 감사한거예요.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게 되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사도 요한이 전하고 싶었던 사랑이 이런 사랑이 아니었을까? 오늘 말씀을 11절과 연결시켜 보면,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도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서로 상처주고 상처 받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12절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사랑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거예요.

 

 사도 요한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초대 교회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너희 모습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구나..” 여러분들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진짜 교회 된 모습으로 우리 청소년부가 세워졌으면 좋겠어요. 교회가 어떤 곳이에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곳이 바로 교회아닙니까? 오늘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보세요. 첫째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둘째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신앙의 여러 단계 중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숙의 단계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앙입니다. 그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풍성해질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데 하나님의 마음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형제가 자매가 서로 사랑하며 교회를 세워갈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드러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서로 사랑하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갑자기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 어찌 사랑할 수 있겠어요. 저와 여러분이 함께 서로 단계를 밟아나가자고요. 그럼 우리가 무엇부터 해야겠어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구해야겠죠. 우리 함께 결단하며 찬양할 때, 주를 더욱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앞에 고백하며 결단합시다.

 

728x90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